일제강점기 조선 사회는 급격한 토지 수탈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전통적인 농업 구조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일본 정부와 일본인 지주들은 조선의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여 소작농을 양산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들의 경제적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소작쟁의(小作爭議)’라 불리는 농민들의 집단 저항 운동이 발생하였다. 소작쟁의는 단순한 생존 투쟁을 넘어, 지역별 정치적·사회적 특성과 밀접히 연결된 민중운동으로 발전했다. 본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소작쟁의의 발생 원인과 전개 양상을 분석하고, 지역별로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를 비교하여 한국 농민운동사의 입체적 이해를 시도해본다.
소작쟁의의 배경과 전개 양상
소작쟁의는 일본인 대지주의 폭리, 높은 소작료, 경작권 불안정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조선인 농민들의 자작지를 박탈하고, 이를 일본인 지주에게 분배하였다. 이에 따라 대다수 농민은 ‘반상소작’이나 ‘도급소작’ 형태로 전락했고,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적 착취가 만연했다. 초기에는 개별적 탄원과 소규모 시위에 그쳤으나, 1920년대 중후반부터 조직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조직 형성과 참여 주체
소작쟁의는 각 지역에서 농민조합 또는 사회주의계열의 농민조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조선농민총동맹(1927년 결성)은 전국 농민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고, 각 지역 지부들은 지주와의 교섭, 시위, 소작 거부 등의 실질적 행동을 주도했다. 참여자들은 대부분 영세 농민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청년 계몽단체, 사회주의자들, 심지어 일부 기독교계 단체까지 결합하였다.
지역별 쟁의의 특징
소작쟁의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지역별로 그 성격과 방식은 달랐다. 전라도는 대지주와의 직접 대립이 빈번했고, 경상도는 일부 보수 성향의 농민층과 결합되어 조심스러운 협상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안도는 비교적 정치의식이 높은 청년층 주도 하에 폭력성을 띤 투쟁이 다수 발생했다. 충청도는 교섭형 소작쟁의가 많아, 제도 개선을 이루어내는 사례도 있었다.
표: 일제강점기 주요 지역 소작쟁의 특징 비교
지역 | 주요 특성 | 주도 세력 | 대표 사례 |
---|---|---|---|
전라도 | 직접 대립, 집단 시위 | 농민조합, 사회주의계 | 함평 농민항쟁 (1931) |
경상도 | 보수적 접근, 협상 중심 | 지식인, 교회계층 | 청도 소작조정사건 (1929) |
평안도 | 정치화, 폭력적 성격 | 청년단, 사회주의계 | 신의주 농민항쟁 (1932) |
충청도 | 제도적 투쟁, 교섭 중심 | 농민조합, 기독교 단체 | 대전 농민 조정운동 (1933) |
결론: 농민의 저항에서 민중운동으로
소작쟁의는 단순한 경제적 불만의 분출을 넘어, 지역 사회의 계급 구조와 정치적 의식 수준을 반영한 조직적 민중운동이었다. 특히 지역별로 나타난 다양한 전개 양상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대응 방식이 결코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험은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농민운동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 사회운동의 지역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