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던 독특한 사상 체계를 바탕으로 한 왕조였으며, 왕릉(왕의 무덤)은 권력과 정신적 상징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성립되면서 많은 왕릉이 방치되거나 훼손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와 후기, 일제강점기, 심지어 근대 초까지도 고려 왕릉을 대상으로 한 도굴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도굴은 단순한 도난 행위를 넘어, 역사 유산 파괴와 집단적 기억 상실이라는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학계와 정부의 노력으로 복원과 보존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부 왕릉은 원형에 가깝게 되살아나 현재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회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왕릉 도굴의 배경, 주요 사건 사례, 그리고 복원 과정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고려 왕릉의 기본 구조와 문화적 가치
고려 왕릉은 대부분 개성 인근에 위치하며, 원형 봉분과 석물(석수, 문인석, 무인석 등)이 배치된 구조로 설계되었다. 불교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향로석과 연화문 장식이 함께 사용되었고, 봉분 주변에 곡장(曲墻)이 둘러져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했다. 왕릉은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위엄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공간이었기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도굴이 발생한 배경
고려가 멸망한 이후 왕릉은 더 이상 국가의 보호 대상이 아니었고,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으며 불교와 관련된 유산을 배척했다. 이로 인해 고려 왕릉은 방치되었으며, 왕실의 후손이 아닌 일반인들에 의해 도굴 대상이 되었다. 18~19세기에는 무장 세력이나 도적 집단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학자와 군인이 조직적으로 도굴에 가담했다. 그 목적은 금속 유물, 사리, 장신구, 부장품이었다.
대표적인 도굴 사례
대표적인 사례로는 공민왕릉과 충렬왕릉 도굴 사건이 있다. 공민왕릉은 조선 후기에 이미 도굴당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무덤 내부 구조를 조사한다는 명목 하에 일본인 연구자들이 봉분을 훼손했다. 또 다른 사례로, 충렬왕릉에서는 고급 금속 유물과 장신구 일부가 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까지도 해당 유물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는 개인 수집가나 해외 박물관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과 보존의 시도
1960년대 이후 고려 왕릉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1990년대 문화재청은 개성 지역과 북부 황해도 일대에 대한 학술조사를 통해 도굴 흔적을 체계적으로 분석했고, 유실된 석물의 복원 및 봉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일부 왕릉은 남북 교류 시기에 공동 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북한 지역 왕릉 중 일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다.
고려 왕릉 도굴 및 복원 요약표
항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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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 배경 | 고려 멸망 후 보호체계 부재, 조선의 무관심, 일제강점기 수탈 |
주요 피해 왕릉 | 공민왕릉, 충렬왕릉, 성종릉 등 |
도굴 목적 | 금속 유물, 사리, 장신구 등 부장품 약탈 |
복원 시작 시기 | 1960년대 이후, 문화재청 중심 복원 추진 |
현황 | 일부 복원 완료, 남북 공동조사 논의 중 |
맺음말
고려 왕릉 도굴 사건은 단순한 도난 사건이 아니라, 한 왕조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이 훼손된 역사적 비극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해외로 반출되었고, 무덤 자체의 원형도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복원과 보존의 노력이 계속되며 점차 고려 왕릉의 역사적 위상이 회복되고 있다. 남북 협력과 국제 공조를 통해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의 전모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고려사 복원에 한 걸음 더 다가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