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일상생활과 문화적 저항

일제강점기(1910~1945년)는 한국인들에게 암울한 시기였지만, 특히 학생들에게는 억압된 교육과 감시 속에서도 미래를 꿈꿔야 했던 모순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청소년들은 단순한 피식민자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이어갔다. 학생들의 일상은 단지 공부만이 아닌, 일본식 교육에 대한 저항, 민족 정체성을 키우는 독서와 자치 활동, 그리고 위생·급식 문제 등 실제 생활 전반에 걸친 여러 갈등과 선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여가, 저항 활동 등을 중심으로 당시의 일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조명해 본다.


식민지 교육 체계 속의 학교생활

조선 학생들은 주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교육 과정은 일본 내각령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일본어가 필수였고 한국어는 '수의과목'으로 밀려났다.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일본 역사, 일본어, 황국신민 의식 주입에 집중되었으며,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는 ‘기미가요’를 부르고, 일본 천황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하는 의식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에서 몰래 조선어 책을 읽거나, 민족 계몽 서적을 돌려보는 방식으로 내면의 저항을 이어갔다.

학생들의 식사와 위생 환경

도시 지역의 학교에서는 급식이 실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보리밥이나 고구마밥, 김치, 된장국이 주를 이뤘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물만 마시며 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흔했다. 위생 환경도 열악하여, 여름철에는 이질과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체벌과 강제 청소가 일상화되어 있었고, 어린 학생들은 잦은 구타로 인해 학업 의욕을 잃기도 했다.

여가와 문화 활동, 그리고 자치 활동

방과 후 활동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정체성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일부 고등보통학교에서는 문학회, 미술반, 야학 동아리 등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민족문학을 접하고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사설을 필사하거나 서로 나누어 읽었다. 영화나 연극 관람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지역 청년회에서 상영하는 독립운동 관련 연극은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학생 저항 운동의 구심점 역할

일제강점기의 학생들은 단순히 피교육자에 머물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인 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 사건에서 비롯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다. 이 운동에는 전국 100여 개 학교, 약 5만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이를 통해 학생들은 조직력과 저항 의식을 대외적으로 드러냈다. 이외에도 각 지역에서 소규모 항일 낭독회, 비밀 조직 결성 등 다양한 방식의 저항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일상 요약

항목 내용
학교생활 일본어 중심 교육, 천황 숭배 의식 강요
급식과 위생 자체 도시락 지참, 보리밥·고구마밥 위주, 위생 상태 열악
여가 활동 문학회, 야학, 민족문학 독서 활동
저항 운동 광주학생운동, 비밀 독서회, 신문 필사 등
정서적 특성 억압 속의 자아 형성과 민족 정체성 강화

맺음말

일제강점기 조선 학생들의 일상은 단순히 교실 안의 모습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억압 속에서도 학문과 문화를 통해 정체성을 지키고,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저항을 지속했다. 일본식 교육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선 학생들은 언어, 문학, 행동을 통해 조용한 저항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저항하는 주체’였으며,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문화적 주체로 다시 평가받아야 할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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