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상업 활동과 국제 무역망 속의 경제 전략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까지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하며 10세기 초까지 존속했다. 흔히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서 군사·문화적 성취가 주목받지만, 상업과 무역 측면에서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인 국가였다. 특히 당나라, 일본, 거란, 흑수말갈, 신라 등과 교역하며 동북아시아 국제 무역망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었고, 이를 통해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정치적 외교 전략도 함께 구사했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상업 구조, 주요 교역로, 수출입 품목, 무역 상대국과의 관계 등을 통해 발해의 경제적 면모를 조명하고,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경제 흐름에서 발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상업 구조와 무역 제도

발해는 국가 중심의 교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관청 주도의 무역과 민간 상인의 활동이 공존하는 구조였다. 수도 상경용천부에는 ‘시전’과 ‘시장’이 존재했으며, 교외에는 국제 상인들을 위한 교역소도 운영되었다. 국경 지역에는 외국 사신과 상인을 위한 접대소와 교역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일부 지역은 상업 활동을 위한 특구로 기능했다. 정부는 교역 세금을 걷고, 전략 품목은 국왕의 명령으로 독점 판매되었다.

주요 무역 상대국과 교류 방식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은 당나라와 일본이었다. 발해는 당에 조공 사절을 자주 보내며 ‘발해국왕’ 칭호를 인정받았고, 이 조공 외교는 실질적인 교역 채널로 활용되었다. 일본과는 해상 루트를 통해 활발히 교역했고, 일본 측 기록에는 “발해 사신은 당나라 사신보다 많았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방문이 잦았다. 또한 거란족, 말갈족 등 주변 유목 민족과는 말, 가죽, 철기 등을 교환하는 실리 중심의 교역 관계를 유지했다.

수출입 품목의 특성과 전략

발해는 풍부한 철, 수렵물, 약재, 비단류 등을 수출했다. 특히 말, 모피, 사향, 인삼, 칠기 등은 중국과 일본에서 매우 인기 있었으며, 일부 품목은 국가에서 직접 통제했다. 수입 품목으로는 당나라의 도자기, 비단, 서적, 약재, 일본의 금속 도구, 직물 등이 있었다. 발해는 중계무역도 수행하여, 중국 물품을 일본에, 일본 물품을 말갈 지역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무역 이익을 극대화했다.

해상 교역로와 물류 거점

발해의 무역로는 육상과 해상을 모두 활용했다. 해상 교역은 현재의 함경남도, 러시아 연해주 해안을 거쳐 일본 사가, 오사카, 나가사키 방면으로 연결되었고, 육상으로는 요동-중원-장안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북동 끝을 담당했다. 주요 항구로는 동경 용원부 일대와 남경 남해부가 있으며, 이곳은 국제 물류의 핵심 거점이었다. 또한 발해는 자체 조선 기술을 활용하여 교역선도 건조했으며, 이는 국가의 무역 독립성에 기여했다.

발해 무역 활동 요약표

항목 내용
주요 교역국 당나라, 일본, 거란, 흑수말갈, 신라
수출품 말, 모피, 인삼, 사향, 칠기
수입품 비단, 도자기, 서적, 금속 도구
교역 경로 해상(동경-일본), 육상(요동-장안)
경제 전략 조공 외교 활용, 중계 무역, 품목 통제

맺음말

발해는 군사력과 문화 외교에 집중한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기반에는 치밀한 상업 전략과 국제 무역 감각이 존재했다. 발해는 국경을 넘는 유통망을 조직하고, 다양한 민족과 외교를 병행하며 경제적 실리를 추구한 실용적인 국가였다. 특히 해상과 육상 무역로를 동시에 활용한 점,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확장한 점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발해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유연한 국가였는지를 보여준다. 발해의 상업 활동은 오늘날에도 동북아 경제사 연구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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