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뿐 아니라 국제 사회까지 휘말린 전면전이었다. 이 전쟁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총을 들지 않은 채 최전방에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여성 간호병들이다. 이들은 생명의 끝자락에 있는 부상병들을 살리기 위해 수류탄이 터지는 참호 옆에서도 주사기를 놓았고, 피투성이가 된 들것을 끌며 생사를 오갔다. 여성 간호병은 전쟁터에서 총을 들지 않았지만, 수많은 목숨을 구한 조용한 전사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 왔으며, 실제 활동 내용과 당시의 조건, 심리적 부담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드물다. 이 글에서는 6.25 전쟁 당시 여성 간호병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그들이 전쟁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본다.
간호병 모집과 훈련 과정
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급격히 늘어나는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긴급히 간호 인력을 충원해야 했다. 이에 따라 간호학교 출신 여성들과 일반 여성 중에서 간호병이 모집되었고, 단기 훈련 후 곧바로 야전으로 투입되었다. 간호병은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았으며, 군의관 지휘 아래 전·후방을 오가며 의무를 수행했다. 훈련 내용은 지혈, 응급처치, 수술보조, 감염관리 등 전시에 필요한 실무 중심이었다.
최전선에서의 근무 환경
간호병들은 실제 전투 지역 근처인 야전병원이나 이동식 야전 수술소(MASH)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매일 같이 포탄 소리와 부상병의 비명을 들으며, 극도의 정신적 압박 속에서 환자를 돌봤다. 의약품은 항상 부족했고, 맨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거나 얼음 대신 찬물에 주사약을 담궈 보관하는 등 즉흥적인 처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일부 간호병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환자를 이송하거나, 피란 행렬 속에서 의료 지원을 하기도 했다.
여성 간호병들의 주요 임무
주요 임무는 부상병 응급처치, 수술보조, 전염병 관리, 정신적 위로 제공 등이었다. 특히 야간 근무 시에는 실명 위험이 있는 조명 대신 촉각과 경험에 의존해 지혈이나 주사를 놓아야 했다. 또 일부 간호병은 간호 외에 행정 지원, 통역, 연락 병의 역할까지 겸해야 했으며, 이는 육체적 피로를 넘어 정신적 탈진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환자들이 이름을 부르며 죽지 않도록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전후에도 이어진 침묵과 희생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여성 간호병들은 사회로 복귀했지만, 이들의 전쟁 공로는 오랫동안 역사적 기록에서 소외되었다. 공식 기록에는 주로 전투 병력 중심의 서술이 많았고, 여성 간호병의 헌신은 가족이나 동료들 사이에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대 이후 여성 참전용사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일부 생존자들은 인터뷰와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참혹한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 여성 간호병 활동 요약
항목 | 내용 |
---|---|
모집 배경 | 전쟁 초기 부상병 급증으로 인한 긴급 충원 |
훈련 및 배치 | 단기 실무 훈련 후 야전병원, 이동수술소로 배치 |
근무 환경 | 포탄, 열악한 장비, 부족한 약품 속 응급처치 수행 |
주요 임무 | 지혈, 수술보조, 감염관리, 심리적 위로 |
전후 평가 | 장기간 역사적 조명 부족, 최근 재평가 진행 중 |
맺음말
6.25 전쟁은 총칼로만 싸운 전쟁이 아니었다. 여성 간호병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최전선에서 하루하루를 전쟁과 싸우며 살아갔다. 그들은 전쟁의 이면을 지탱한 실질적 주체였고, 그 헌신과 용기는 지금까지도 기억되어야 한다. 전쟁의 영웅은 전투 병사만이 아니라, 목숨을 잃어가는 이를 끝까지 돌보던 조용한 손길에서도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후대에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